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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나빌] 호접몽

이기님 2009. 12. 19. 06:44


과거이야기 - 신청 미션

 

 

 

배가 너무 고팠다.

너무 배가 고파서 시체라도 뜯어먹고 싶어지는 자신의 마음이 무서웠다.

어차피 죽으면 다른 짐승과 같이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입안에 침이 고이고 위가 쓰려왔다.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극심한 배고픔과 주위에 널려 있는 시체들은

점점 이성을 잃게 했다.

 

 

 

 

[아가나빌] 호접몽

 

 

 

 

 

눈앞에서 맨몸이 다 비치는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여자는 예뻤다. 그녀의 몸놀림에 따라 가느다란 손목에 걸린 팔찌와 -묵직하게 목에 감긴 가죽목걸이에 연결된- 쇠사슬이 짤랑이며 노래를 불렀다. 술을 마시던 남자들은 시끄럽게 웃으며 춤추는 여자를 부추기며 말로 희롱했다. 놀림이라기보다는 수치에 같은 말이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으레 닳고 닳은 여자들이며 그 음란한 것은 타고 난 것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착각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다른 술집이 아닌 바로 이 곳, 매줏집 안에서 목에 쇠사슬이 걸린 가죽 목걸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가나빌은 조용히 춤추는 여자의 몸짓을 응시했다.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던 여자가 아가나빌의 존재를 알아 챈 듯 흘끗 바라본다. 찰나의 시선이었지만 이미 여자와 아가나빌은 그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쳤음을 느꼈다. 혼혈이라는 피는 어떻게 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걸까. 세상에는 드래곤도 많고 마족도 많고 천족도 많고. 핍박받아 겨우 명맥을 유지하지만 인간들도 많은데. 그들이 섞인 혼혈족은 그 섞인 종족의 피를 불문하고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여자의 눈이 애처롭게 떨리며 몇 번 그렇게 아가나빌과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마주했던 시선을 외면했다. 여자가 요염하게 손을 허공에 저었고 그 손은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공기 속을 유영했다. 아가나빌도 곧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시야에서 빗겨냈다.

 

그것은, 동족에 대한 애잔함과.

노예의 목걸이를 하고 춤을 추고 있는 여자의 질투와

목걸이를 하지 않고 오롯하게 서있는 아가나빌의 애도와

그 둘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자신들의 피에 대한 체념이었다.

 

 

그 날 아가나빌은 그녀를 죽였다.

 

 

 

 

* * *

 

 

 

 

“여전히 음울한 인상이구나.”

 

들어오자마자 여자가 대뜸 한 소리였다. 침대에 걸터 앉아있던 아가나빌은 가볍게 목례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여자는 지친 듯 의자에 주저앉으며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탁한 금발을 쓸어 올렸다.

 

“더러운 이종족 같으니. 난 역시 이종족이 싫다니까.”

 

대답을 원하고 하는 말이 아니라 -아가나빌이 혼혈이라는 것을 아는- 그녀의 입버릇 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아가나빌은 침묵했다. 여자는 언제나처럼 의자에 기대듯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며 무성의하게 테이블 위에 종이쪽지 하나를 던졌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아가나빌은 테이블 위에 던져진 종이쪽지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여자는 이종족을 싫어했다. 그것은 아가나빌과 그녀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고 그녀는 그 후로도 심심치 않게 이종족에 대한 불쾌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곤 했다.

 

알고는 있지만 들을 때 마다 조금 우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녀가 오기 전에 미리 나갈 채비를 마쳐 놓았던 터라 따로 준비할 것이 없었건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은 무언가를 빠뜨린 것처럼 무거웠다. 먼지가 바스라지는 나무 바닥을 밟고 녹이 슨 경첩이 지르는 외마디 비명을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돌아올 예정이냐?”

“…….”

“삼일정도면 충분하다고 보지만.”

“…맞춰서 돌아오겠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무시가 아니라 이미 일상적인 일이다. 여자는 아가나빌과 처음 만났던 하루를 빼고는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쳐 온 적이 없다. 그래서 아가나빌도 그녀의 방식에 순종해 먼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전해준 쪽지를 잘 갈무리 해 방을 나설 뿐이다. 그것이 그녀와 아가나빌의 룰이라고, 아가나빌은 생각했다.

 

습하고 어두운 방 안에서 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구멍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빛이 반사되어 유난히 창백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아가나빌은 방문을 닫았다.

 

 

 

 

* * *

 

 

 

 

왁자지껄한 소리가 널리퍼지는 매줏집안으로 아가나빌이 들어섰다. 집에서와 다르게 얼굴이 드러나는게 그리 권장되지 않는 일을 하는 만큼 후드가 달린 로브를 챙겨 입은 아가나빌은 검은 로브에 둘러쌓여 평소보다 더 음침하게 보였다. 분위기만 봐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구석에 자리를 잡은 아가나빌은 최대한 존재감을 죽이며 급사에게 스튜와 맥주 한 잔을 주문하며 몰래 급사에게 여자에게 받은 쪽지를 건냈다. 미성년자인 만큼 맥주를 마시지는 않겠지만 매줏집에서 술을 주문하지도 않고 앉아 있는 건 의심받기 딱 좋은 일이었다.

 

우연인지 아닌지 저번 지령도 이곳에서 있었다. 동족이라 말 할 수 있는 혼혈의 노예를 사고인 듯 위장하여 죽이고 돌아 간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었지만 죽은 노에의 자리는 이미 새로운 노예가 차지하고 있었다.

 

조금 앉아있자 급사가 스튜와 맥주 한잔을 가져다주고 갔다. 아가나빌이 스튜를 먹는 척 하며 능숙하게 그릇 밑에서 새로운 종이쪽지를 챙겼다. 어차피 보통의 글이 아니라 암호로 만들어진 글자를 쓰기 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없지만 그 전달과정은 은밀하다. 적당히 스튜 그릇을 비우고 값을 치르고 나온 아가나빌은 골목길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며 종이 쪽지를 펼쳤다.

 

 

「바다의 우리에서 파도가 나비를 집어 삼킨다. 나비 무덤.」

 

 

허무할 정도로 짧지만 잔인한 문장을 읽으며 아가나빌은 흠칫, 몸을 떨었다.

바다라는 곳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물이 끝없이 이어지는 매우 커다란 강이라고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물의 향연이 계속 되는 곳. 그러나 이 문장에서 말하는 그 바다가 아닐 것이 뻔했다. 평상시 정말 단순하고 농담 같은 문장으로 암호를 구상하던 쪽지와 다르게 이번의 쪽지는 의아할 정도로 공격적이었고 선정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바다가 아니라 파도다.

바다는 아가나빌이 살고 있는 마을의 이름이었다. 바다, 그 자체는 아니지만 바다를 뜻하는 구어가 굳어져 마을의 대명사를 만든 이름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일어나는 파도는 바다가 알지 못하게 물결치는 뒷골목의 세계의 은어다. 파도는 아가나빌이 속해있는 ‘조직’을 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비는?

 

일주일 전에 죽인 혼혈의 노예가 생각났다. 혼혈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은 듯 인간의 모습으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정말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헤일로이드였다. 아름답고 그녀가 추는 춤은 손끝부터 섬세하여 한 마리 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가죽목걸이에 이어진 쇠사슬이 무색하게 짤랑이는 소리마저 아름다운 방울 소리로 만들어 버리는 애처로움과 아름다움이 있는 여자였다.

 

일주일 전 매줏집이 폐장하는 시간에 맞추어 나가는 척 하고 그림자 속에 숨어든 아가나빌은 그녀가 쇠사슬에서 벗어나 도망가는 것을 도와 매줏집의 장정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녀 스스로가 도망쳐낸 것처럼 그녀를 마을의 북쪽 문으로 인도했다.

 

마을에는 동문과 서문, 그리고 북문이 있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문은 동문과 서문이었다. 아가나빌이 그런 마을의 다른 문을 두고 굳이 북문으로 인도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북문으로 나오면 마을의 공동묘지가 있고 그곳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묘지를 만들 돈이 없거나 연고가 없거나, 혹은 죽임을 당한 이들이 버려지는 숲이 나온다. 지금까지 아가나빌이 ‘일’을 하며 죽어간 이들도 전부 이곳에 버려졌다.

 

아가나빌의 임무는 그녀를 도망치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헤일로이드의 모습으로 죽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계까지 몰아 붙여 헤일로이드의 날개를 드러내게 해 죽였다.

의뢰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죽이라고 한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가나빌은 그 증거로 헤일로이드의 날개를 도려내 가져갔고 여자 노예는 시체 속에서 다른 시체들처럼 나뒹굴어 버려졌다. 찾는 이 없이, 구원자 없이, 허망하게.

 

그러나 그녀는 카나리아였지 나비가 아니었다. 노래하고 춤추는 새가 아니라 날개가 찢기면 밟혀 죽는 나비가 파도에게 삼켜진다는 말은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나비.

아가나빌은 문장을 다시 입안에서 읊조렸다.

바다의 우리에서 파도가 나비를 집어 삼킨다. 나비 무덤.

문득 허벅지에 새겨진 어느 나비문신이 생각났다. 탁한 금발에 파도를 이끌고 마을 속을 조종하던 나비.

 

‘설마.’

 

아가나빌은 부정했다. 조직에 관해 자세히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조직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그녀를 줄일 가닭이 없다. 심지어 아가나빌이 받는 지령은 쪽지를 전해주는 그녀 스스로가 적어 아가나빌에게 건네 주는 것이었다. 아무리 조직의 일이라지만 그렇게….

 

 

일주일 전과 달리 이번에는 유인 하거나 사전 작업을 준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밤이 되자 아가나빌의 방에 다시 찾아왔다. 방안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아가나빌은 애써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번 흘끗 방안을 둘러본 여자는 아가나빌이 보이지 않음에도 미련 없이 돌아서 북문으로 마을을 빠져나갔다. 거침없이 북문으로 간 여자는 마을의 공동묘지 앞에서 잠시 멈춰서더니 이내 다시 걸어 숲으로 향한다.

 

어째서.

 

숲의 공터에는 무덤이 만들어지지 못한다. 무덤을 만들 허락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곳에 무덤을 만들지 않는 것은 피를 머금은 이 숲의 토양이 무척이나 독성이 강하다는 것과 아무리 깊게 파묻어도 곧 들 짐승들이 시체를 파 꺼내 먹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낮에는 구더기들이 시체를 파먹고, 시체가 버려지고, 숲이 시체의 양분을 잡아먹었다. 이 숲은 그런 곳이었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여자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가나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틀리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녀 스스로가 죽음을 원하는 것이라고 하기엔 낮에 자신에게 첫 번째 종이쪽지를 전해 줄때에도 아무런 낌새를 보이지 않았지 않은가.

그렇게 숲의 입구에서 망설이고 있는데, 문득 숲 안쪽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시체를 먹으러 온 들짐승에게 노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연 듯 든 아가나빌이 자리에서 박차고 여자를 따라 들어가자 굴러다니는 돌조각을 들고 수풀을 향해 집어 던져 일부러 바스락 거리는 수풀 소리를 내고 있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느려 터졌구나.”

“…….”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의도를 모르겠다.

 

“정확한 지령을 말해주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들어라, 명령이니까.”

“…….”

 

명령.

 

“나는 이종족의 손에 살해당하는 거다.”

“이종족의…손에 입니까?”

“그래. 나는 이종족에게 살해당하는 거다. 네가 아니면 할 수 없지.”

 

혼혈족인 아가나빌을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자신을 죽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는 여자를 보며 아가나빌은 그녀와 자신이 함께 지낸 9년 동안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이걸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저번에 다른 하프를 죽이며 네 본성을 어느 정도 일깨웠다고 생각하는데.”

“…….”

 

아가나빌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을 거부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일주일 전의 헤일로이드. 전투능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혼혈족이었지만 그녀를 헤일로이드로써 죽이기 위해 몰아가면서 지금까지 억눌러 온 피가 술렁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그 피를 불러일으키면 그 피가 게걸스럽게 아가나빌의 육체를 점령해 올 것이란 것도.

 

“…어째서 입니까.”

“그래야 하니까.”

“…….”

“명령이다. 시행해라.”

 

명령.

그녀를 만나고 9년간 길들여진 명령이란 말에 대한 복종의 습관이 아가나빌을 구속했다. 의아해도, 납득하지 못해도 몸은 순순히 그 말에 반응하여 스스로를 순종케 했다.

 

지금까지 억눌러온 자신의 본성을 불러일으켰다.

아가나빌의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두운 숲속의 공터에서 검게 물든 머리카락이 그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검은 옷으로 감싼 등에서 검은 날개가 솟아나고 아가나빌의 손이 비상식적으로 부풀어 올라 커졌다. 잇몸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이가 인간의 것과 달리 날카롭게 벼려진다.

 

“네 본 모습이구나.”

“크르르ㅡ”

 

오랜만에 깨어난 피가 몸의 세포를 점령하며 기쁨의 울음을 토해냈다. 두려움으로 분노로 울어대던 새와 달리 나비는 그 눈꺼풀을 무미건조하게 팔랑일 뿐이었다. 무덤덤하게 아가나빌이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지켜 본 여자는 두 팔을 벌려 아가나빌을 맞을 준비를 했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후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아가나빌을 고개를 가로 저었다. 돋아난 뿔이 고개를 저으면서 머리카락과 함께 부딪혀 느낌이 생경하다. 그 감각이 싫을 법도 한데 깨어난 피는 자유로워 기쁘다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본능을 깨워낸 자신은 자신 같지 않은 흉포함과 냉정함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둘이 된 것 같았다.

 

“와라.”

“……!”

 

그녀의 입이 웃은 것 같이 보인 것은 착각일까. 아가나빌은 땅을 박차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고통스럽게 발악하다 죽은 모습을 남겨야 했기에 그는 그녀의 목을 물어 뜯지 못했다. 아가나빌은 여자의 어깨 죽지를 물었다. 어깨뼈가 입안에 씹히고 비릿한 혈향히 예민해진 코를 자극했다. 근력이 강화된 손을 휘둘러 그녀를 나무둥치로 던져내고 그녀의 다리를 밟아 부러트렸다.

 

고통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아가나빌은 웃었다. 당신이 원하던 겁니다. 만족하시나요.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 동맥과 정맥과 근육을 물어 뜯어 그녀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못하게. 무릎으로 그녀의 척추를 정확히 가격해 고통의 회로를 차단했다. 신경이 끊어진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도록. 그녀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최대한 처참하도록. 최대한 잔인하도록. 최대한, 눈물을, 삼기토록.

 

“하아… 하아.”

“…쿨럭….”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은 그녀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썩고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시체의 숲에 널부러진 여자는 몸 여기저기가 너덜너덜 했지만 그 형체는 온전했다. 솟아나오는 붉은 피가 어두운 밤의 그림자에 가려 검게 보인다. 손끝 하나 까딱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도 내버려진 다른 시체들과 같은 고기 덩어리 같이 보여 섬뜩하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아가나빌은 데자뷰를 느꼈다.

 

“…난…쿨럭, 이…종족…이 싫…다.”

“그래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나를 인간이라 생각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넌 인간이…아니…ㅇ.”

 

구멍난 기도로 쌕쌕 숨을 몰아쉬던 여자는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이 끊어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비수가 되어 아가나빌의 가슴을 찔렀다. 이종족에게 아이를 잃은 어미는 과거의 모습이 어땠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하고 건조했으며 이종족을 미워했다. 그런 여자를 보며 아가나빌은 스스로를 최대한으로 억눌러왔다.

 

가능하면 인간처럼, 가능하면 보다 인간스럽게. 무엇이 혼혈과 인간을 구분짓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혼혈이라는 굴레를 죽기 전에는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잘라냈다.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 여자가 아닌 마을사람들은 아가나빌이 혼혈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정작 인간으로 인식되고자 했던 여자에게 아가나빌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이 아닌 혼혈이었다.

변이한 모습으로 자신을 죽이게 할 만큼이나.

 

 

 

 

* * *

 

 

 

 

마지막 지령을 완수하고 피를 씻어낸 아가나빌은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침대에 걸터앉았다. 열쇠도 훔쳐갈 물건도 없이 그저 눈이나 붙이는 곳이지만 아가나빌에겐 그래도 하나뿐인 보금자리였다. 그렇게 침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여자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리곤 성의 없이 의뢰가 적힌 종이쪽지를 아가나빌에게 전해 준다.

 

그렇게 의뢰를 받아서 나갈 때면 늘 여자가 창문 밖을 보며 머물다 갔기 때문에 아가나빌은 그 시간이 좋았다. 비록 돌아오면 여전히 아무도 없는 빈 방이었지만 가끔 그녀가 물을 마시고 내버려둔 물 컵이나 창문 쪽을 향해 비뚤게 놓여있는 흔적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이제는 더 이상 없을 일이지만.

 

-똑똑

 

유난히 지치고 피곤한 몸에 스륵, 눈이 감겨드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침잠하던 의식이 다시 떠올랐다.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 터라 조금 망설이다 문을 열자 몇 번 면식이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마지막 임무도 완수 했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 라고 중얼거린 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일’ 로 본 것이 전부이건만 아가나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곤해서 쉬고 싶은 마음에 용건이 있으면 빨리 하고 가라는 눈짓을 하자 남자는 들고 있던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성의 없이 내밀었다.

 

“네 꺼다.”

“……?”

“나비가, 아, 너는 모르겠군. 너에게 연락을 전하던 여자의 이름이다. 너를 주워왔던.”

“…….”

 

남자는 아가나빌의 마지막 지령이 그녀였음을 애써 언급하지 않았다. 아가나빌은 그녀에 관해선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이름이 나비가 라는 것을 안 것도 9년만에 오늘이 처음이었건만 이미 죽은 자의 이름은 알아도 부를 일이 없다.

 

“그녀가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들?”

 

아가나빌은 되물었다. 자신이 알기로 그녀에겐 자식이 없었다.

그녀에게, 아니 나비가에게 아이는 단 한번 이종족의 손에 갓난아이를 떠나보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가나빌이 나비가를 만난 것도 나비가가 마을의 공동묘지에 아기의 무덤을 만들 허가를 받지 못해 마을의 시체를 버리는 공터에 아기의 시체를 묻으러 왔을 때 였다.

 

“깊게 관여는 안했지만 너도 우리가 어떤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 조직 안에서 너는 그녀의 ‘아들’ 이라고 되어있었다. 네가 아무 연고 없이 기술을 배울 수 있을리 없지.”

 

나비가가 어떤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비중 있는 지위의 인물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일부러 깊게 관여 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자신은 그녀의 일에 관여할 자격이 없었으며 심지어 아가나빌은 -나비가가 싫어하는- 혼혈아였다.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 와중에 그런 곳에 얼굴을 내밀었다간 그녀가 곤란해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당신을 죽이고 난 이제 와서?

 

아가나빌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어머니란 호칭으로 불러 본 적이 없었다. 그녀 역시 아가나빌을 아들이라 부른 적 없었다. 그래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적 없었다.

 

아가나빌은 망연하게 남자가 건네주는 나무상자를 받아들었다. 다른 잠금장치 하나 없이 그저 경첩 하나만 달려 있는 싸구려 나무상자는 손쉽게 열렸다. 상자 안에 든 것은 금화 두어 개가 흐트러져 쏟아져있는 주머니 하나와 성의 없이 두 번 접힌 종이쪽지. 얼핏 눈으로만 보기에도 돈이든 주머니는 홀쭉했지만, 여자의 조언으로 그 동안 의뢰를 해결하면서 모아온 돈의 절반의 절반도 안돼 보이는 돈일지언정 그것이 자신의 앞으로 건네져왔다는 사실이 아가나빌을 더욱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재산을 정리하고 남은 것이니 난 미련 없다. 다른 건 조직 몫으로 챙겼으니까. 넌 이제 죽은 거다. 인간을 잔혹한 손속으로 죽인 이종족에게 너도 같이 죽은거야. 무덤에 있을 나비가의 시체는 우리가 수거해 갈 테니 준비되는 대로 넌 마을을 떠나.”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아가나빌은 자신이 무신경하게 남자의 앞에서 상자를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많은 이득을 챙긴 듯 금화 몇 개가 겨우 든 주머니에 코웃음을 치지만 만약 이 상자 안에 다른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면 -더욱이 그것이 임무에 관련된 것이었다면- 큰 실수를 할 뻔한 일이었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 그리고.”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가나빌에게 가볍게 던졌다. 얼결에 그것을 한손으로 받아 채 보니 발목에 하는 싸구려 장신구였다. 남자가 키득거리며 몸을 돌렸다. 자신이 할 일은 마쳤으니 가보겠다는 제스츄어였다.

 

“잘 가라, 꼬마. 다신 마주치지 말자.”

“잠깐. 조직…은 왜 그런 짓을, 한…”

“그건 네가 알바 아니다.”

“…….”

“네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고 내가 아는 것도 전부가 아니다. 그저 난 윗분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야.”

 

잠시간 돌아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가나빌은 다시 문을 닫고 방안에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 * *

 

 

 

며칠이 지났다.

지금껏 ‘일’을 해오면서 수 도 없이 시체를 만들어 왔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했기에 한 번도 자신이 만든 시체를 찾아와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가나빌은 처음으로 자신의 흔적을 찾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숲과 가까운 홍등가 골목의 빛이 창백한 얼굴에 반사되어 여자의 얼굴을 혈색이 돌아 보이게 만든다. 그 모습이 정작으로 고와서 아가나빌은 처음으로 시체를 향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구더기가 그 위를 기어다니고 상처가 헤집어져 시체의 진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살포시 감긴 눈꺼풀과 살짝 열린 입술과 뻣뻣하게 굳어 내버려진 실재감 없는 모습이 곱디곱게 보여서 서러웠다.

 

발치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탁한 금발이 발목에 휘감겨 자신과 함께 가자고 속삭인다면 주저없이 그러겠노라, 함께 하노라 하고 싶건만 그것은 정에 굶주린 어린 드래고노이드의 헛된 상상으로 만들어진 환상일 뿐, 널브러진 시체는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아가나빌은 준비해 온 곱고 깨끗한 하이얀 천을 꺼내 고기 덩어리의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세상으로부터 그 모습을 숨겨 나갔다.

 

늘 발목에 하고 있던 발의 장신구는 이미 아가나빌의 장화 속 발목에 감겨 허전했지만 천속에 숨겨진 발목은 더 이상 아가나빌을 후회케 하지 않았다. 엉망으로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허벅지의 나비 문신은 가끔 꿈속에서 보던 아지랑이마냥 눈앞을 어지럽혔지만 천속에 숨겨진 허벅지는 더 이상 아가나빌을 망설이게 하지 않았다. 뒷골목의 여자답게 늘 주리고 가난했던 증거의 갈비뼈가 드러난 마른 배와 볼품없는 가슴은 애처로웠지만 천속에 숨겨진 그 앙상함은 더 이상 아가나빌을 슬프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하는 인의적인 불빛으로 혈색을 표하는 창백한 얼굴은, 꽃이 피어나던 늦봄의 한낮에 피어나던 진달래의 옆에 환영받지 못하던 분홍빛 철쭉의 것처럼 곱디 고왔지만, 그 고운 뺨에 떨어진 두 방울의 눈물마저 곱게 만들진 않았기에, 아가나빌을 외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가나빌은 아롱지는 흔적을 감춰내려 그 얼굴마저 하이얀 천속으로 세상으로부터 숨겨버렸다.

 

 

 

 

* * *

 

 

 

 

나무 상자를 무릎에 올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주머니를 집어 들자 상자 안에서 금화를 쏟아냈던 것과 달리 주머니 안에는 작은 상급의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금화는 눈속임 이었던 듯 했다. 아가나빌은 그것과 손안의 장신구를 응시하다 성의 없이 접혀져 있는 종이쪽지를 꺼냈다.

 

종이쪽지는 유언이 담겨있으리라 생각되는 것에 비해 너무나 거친 질감에 성의 없이 두 번 접힌 것이 평소에 나비가가 아가나빌에게 지령을 전해 줄 때와 같아 마치 나비가가 살아있어 전해 준 새로운 지령 인 것 같았다. 너무나 익숙해서 지금의 상황이 혹시 꿈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솟았다.

 

여자의 이름은 사실 나비가가 아니고 그녀는 아가나빌을 아들이라 칭하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 임무는 그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여자와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가나빌은 망설임을 멈추고 종이쪽지를 펼쳤다. 하 등급의 거친 종이가 손 안에서 제 몸을 펼쳐내자 익숙한 여자의 필체가 보였다. 글씨의 끝을 길게 밑으로 내려서 쓰는 특유의 글씨체는 여전히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짧게 적고 있었다.

 

「세르펜으로 가라. 거기서 너 좋을 대로 하거 라.」

 

아가나빌에게 남겨진 마지막 지령이었다.

 

 

 

 

* * *

 

 

 

 

배가 너무 고팠다.

너무 배가 고파서 시체라도 뜯어먹고 싶어지는 자신의 마음이 무서웠다. 어차피 죽으면 다른 짐승과 같이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입안에 침이 고이고 위가 쓰려왔다.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극심한 배고픔과 주위에 널려 있는 시체들은 점점 이성을 잃게 했다.

 

먹으면 살 수 있다. 어린아이의 이성은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라 머릿속을 가득 매우는 생존의 본능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눈앞에서 헝크러져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점점 짙어지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더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음 속의 무언가를 저버리고서라도 살고 싶어 하는 부정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살고 싶었다.

 

먹으면 살 수 있다. 공터에 널려 있는 시체를 사이로 바닥을 짚은 손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비늘이 돋고 괴이하게 커다래진 손을 힘없이 내려다보았다. 지금이라면 차갑게 굳은 시체라도 뜯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먹으면 살 수 있다.

그저 살고 싶다는 바람하나로 허우적거리며 마지막 힘을 겨우 쥐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망설임을 죽이고 고기를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마침 가장 가까운 곳에 그나마 살이 부드러울 것 같은 머리털이 긴 고기가 보였다. 그 고기의 옆으로 힘겹게 걸어가 털썩 주저앉자 너무 괴로워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따뜻한 게 볼을 타고 흘렀다. 입안이 간지러웠다. 오랜 허기에 뱃속의 위장은 이미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먹으면 살 수 있다.

살고 싶다.

 

천천히 고기를 향해 팔을 뻗는데 문득 인기척이 느껴지고 몸 위로 그늘이 졌다.

생물의 반사 작용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돌아보자 발목에 싸구려 장신구를 하고 있는

여자의 다리가 보였다.

 

“너, 어미가 없느냐?”

“…….”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사람의 형태가 얼핏 보였지만 눈앞이 흐릿해 잘 보이지 않고 그저 검은 그림자로만 보였다.

 

“너도, 버려진 아이냐?”

“…….”

 

어느 샌가 입안의 간지러움이 사라져 있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에선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짐승의 소리밖에 새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지독한 갈증과 허기짐은 아이를 짐승으로 만들었다. 버려진 시체일 지언정 인간의 고기를 뜯어 먹고서라도 살고자 했던 짐승으로.

 

“이름도 없느냐?”

“…….”

 

흐릿해서 부옇게 잘 보이지 않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 지며 여자의 말도 또렷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여자는 탁한 금발을 성의 없이 질끈 묶고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나랑 가자. 너에게 굶지 않을 정도의 먹을 것과 이름 하나는 줄 수 있다.”

“…….”

 

여자는 짐승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은 색으로 물들었던 머리카락이 색이 빠져나가더니 여자를 닮은 탁한 금발에서 밝고 진한 금발로 돌아왔다.

초점이 완전이 돌아온 아이가 바라본 여자의 눈동자 속에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한 지저분한 행색의 자신이 담겨있었다.

아이는 여자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힘없이 떨리는 손을 뻗어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아이의 손을 힘있게 잡았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아가나빌’ 이다. 가자, 아가나빌.”

 

 

 

 

 

 

 

 

                                                                            [아가나빌] 호접몽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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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다리) 매줏집(賣酒-)은 ‘술집’의 잘못된 표현이지만 적절하다고 생각되어 사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