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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찾었다

이기님 2015. 6. 7. 02:04


"하루를 줄게. 하루만에 내가 너를 허락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봐. 그러면 그 땐, 나를 주지. 물론 이 반지와 함께. 기회는 한 번 뿐이야."

 

 

 지그로아가 앉아있는 의자의 바로 옆 탁자에 살짝 걸터 앉은 랄프가 지그로아를 내려다 본다. 곧은 눈매의 남자가 그 눈동자에 오롯히 자신을 담고 있는 것은 지그로아에게 있어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자신보다 강하고, 치밀하며, 결코 쉽지 않은 남자다. 높을 곳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 잡아 오직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지그로아는 보라색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담고 있는 랄프를 바라보았다. 좀 더 불안한 표정을 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랄프는 제법 능글맞은 표정을 짓는다. 그런 랄프를 보며 지그로아의 머릿속에서는 몇 개의 연산이, 겉으로 표나지 않게 계속 이뤄졌다. 랄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어떤것이든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그로아에게 시간은 필요없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지그로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원한다면 시간을 줄게. 그대가 말하는 대로, 하루의 시간을. "

 

 

 

 

 

 

[에스파다/지그로아]

 

시간 (with 랄프)

 

 

 

 

 

 

  어제 랄프에게 여벌의 단복을 빌려온 지그로아는 깔끔하게 단복을 챙겨입었다. 랄프의 몸에 맞춰진 옷이라 맵시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제법 봐줄만한 모습이지 싶다. 목 부분의 프릴은 도무지 취향이 아니라서 풀러 책상위에 놓고, 대신 서랍에서 여분의 리본을 꺼내 묶었다. 개조를 하지 않은 형태의 단복은 전의 단복과 꽤 다른 느낌을 준다.

 


"음, 제법 괜찮은데."

 


 어른이 된 자신이 마음에든다. 몸이 커진 것이 기뻤다. 선이 가늘지는 않지만 열여덟의 나이에도 평균키곤 작은키에, 근육이 붙어 단단한 팔과 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얇은 편이었다. 기본 뼈대가 가늘어 나오지 않는 적절한 맵시가, 이제야 커버가 된것이다.


 팔을 움직일때마다 적당히 움직이는 승모근, 팔에 힘을 줄때 움직이는 삼각근과 상완근에 느껴지는 힘이 다르다. 몸을 조금 비틀자 전거근과 외복사근이 적당히 팽창하고 이완한다. 등뒤를 감싸는 광배근이 기분좋게 긴장하는게 즐거워서 지그로아는 이렇게 저렇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근육 하나하나를 파악하고 움직여보려고 하자, 무리없이 몸이 따라온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랄프를 이기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거울속의 자신을 들여다 보며 이런저런 표정을 짓던 지그로아는 곧 만족스럽게 방을 나섰다.

 

 


* * *

 

 

 

 에스파다의 근무는 보통 2인 1조로 움직인다. 아침훈련을 마치고 가볍게 샤워를 하고 당번제로 관리하고 있는 마구간을 찾은 지그로아는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발견하고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랄프를 보고 유쾌하게 웃었다. 곤란해한다기보다는 골치가 아프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아서 그에게 빌려입은 옷을 자랑하듯 내보이며 앞에섰다.

 


"오늘 근무 파트너가 나라는 걸 알고 말한건 줄 알았는데."
"...맙소사."

 


 설마 몰랐다고 말하는건 아니겠지, 그대? 조곤조곤 덧붙이자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랄프가 또 웃겨서 지그로아는 씨익 웃었다. 사적인 일에서는 미묘한 상태일지 몰라도, 그것을 공적인 일에까지 끌고 올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 웃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지.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하는걸 좋아하는 지그로아는 묘한 표정의 랄프를 지나쳐 마구간 안으로 들어섰다.


 에스파다의 단원들이 마구간을 관리하기는 하지만, 사람의 성격이 모두 제각각이듯, 주인이 다른 말들의 성격도 제각각이라 전부 관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말이란 동물은 무척이나 예민한 동물의 축에 속하는지라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먼저 마구간에 들어온 지그로아는 마구간에서 일하는 몇 시종을 손짓으로 불렀다. 시종에게 말의 이름과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해 받는다.


마방 청소는 말들을 산책 시키는 사이 시종들이 해주고 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우선 안장의 끈이 헐겁거나 많이 닳아 불안하지는 않은지, 끊어진 곳은 없는지, 가죽을 덧대야 하지는 않은지 확인한다. 사람의 수만큼 말들의 수도 만만치 않은 만큼 매일 확인해 주지 않으면 누락되는 일이 적잖이 일어나는데, 그 사소한 실수는 낙마라는 큰 사고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혹여, 수리하거나 교체해야 할 안장이 있으면 그 날 담당이었던 단원의 이름하에 처리된다.


 뒤늦게 뒤따라 마구간에 들어온 랄프는 능숙하게 시종을 부리고 안장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는 지그로아를 잠시 바라보았다. 지그로아는 시종에게 두개의 안장을 교체하고 한개의 안장은 가죽을 덧대라는 명령을 내리곤 직접 안장을 하나 챙겨서 랄프에게 다가왔다.

 


"붉은색 갈기를 가진 말을 그대가 맡아."

 


이름이 시가렛이래. 지그로아는 랄프에게 그녀가-그 말은 암컷이었다- 근래에 산책을 하지 못해 기분이 좋지 않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를 덧 붙였다. 자칫하면 근무시간 내에 마방에 넣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겨 산책이란 이름하에 신나는(?) 질주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가서 비위좀 잘 맞춰주고 와. 여자를 다루는 데 익숙한 그대이니 적격인 일이지? "
"...뭔가 좀 다른 것 같다만."

 


 게다가 -붉은 빛의 탐스러운 갈기를 가졌다는- 시가렛은 아무리 봐도 지그로아가 서 있던 바로 뒤 마방에 있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랄프가 직접 가면 되는 것을 굳이 지그로아가 무거운 안장을 가지고 이 쪽으로 올 필요가 없지 않았나 싶어 지적하자, 지그로아는 랄프의 말에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굼뜬 랄프의 행동 탓을 했다.

 


"다녀와서는 승마장 두번째 코스의 목책들을 확인해야 하니까, 어서 다녀와."
"...상관없는건가?"

 


지그로아가, 뭐가? 하고 고개를 갸웃였다. 그리고 속으로는 웃었다. 그와 있으면 유쾌하다. 지금 안장을 손에 들고 조금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랄프 워커는 -어제에도 생각한 것이지만-생각보다 틈을 보일 때가 많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유'를 만들어야할 지그로아가 이토록 태평하게 자신을 대하는 것이 의심스러운 듯 했다. 하지만 지그로아에게 있어 랄프와 이야기한 조건은 조금 달랐다.


지그로아는 피식 웃고는 랄프의 손에서 다시 안장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랄프가 가르킨 쪽에 있는 갈기가 풍성한 말의 마방에 들어가 말의 등 위에 쿠션역할을 하는 천을 덮고, 그 위에 안장을 올린다. 기사는 말을 타는 기마병일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손길은 제법 능숙하다. 등자를 안장과 연결해 달고, 뱃대끈도 꼼꼼히 묶은 지그로아는 새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랄프 워커". 

 


 그대는 부끄러움이 많아. 라고 낮게 읊조린 말에 랄프의 볼이 잠깐, 경련을 일으킨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반응을 즐기며 지그로아는 시가렛이라는 이름의 타오르는 아가씨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랄프는 여유로워보이는 지그로아가 사실은 잠이 덜깬 상태로 근무에 나온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다. 지그로아는 경악과 정신을 의심하는 시선을 감추지 않는 랄프가 웃겨서 웃음이 나올 것 같은걸 애써 참았다.

 


"내가 그대와 하루의 시간을 갖는 걸 승낙한 이유는, 그대가 생각하는 이유와는 달라."

 


지그로아는 시가렛의 갈기를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고삐를 잡아 천천히 마방 밖으로 이끌어 랄프의 앞에 섰다. 간만의 외출이 즐거운지 시가렛이 푸르릉 소리를 내며 투레질을 하자, 지그로아는 시가렛의 목을 두들기며 워, 워, 흥분을 달랬다. 그리고 랄프에게 시가렛의 고삐를 건낸다.

 


"그대는 이미 나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잖아."

 


랄프가 다시 멍청한 표정이 된다. 다른 사람의 표정을 흐트러트리며 즐거워하는건 성격이 나쁜행동 같지만 그래도 평소에 보이지 않던 표정을 자신이 짓게 한다고 생각하면 설레기도 한다. 솔직하게 생각을 말해주면 랄프도 편해하련만 말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면 랄프가 자신에게 쉽사리 넘어오지 않을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가 긴장하고 언제나, 자신을 의식하기를 바란다. 랄프는 금새 흐트러진 표정을 고쳤다.

 


"어디서오는 자신감이지?"

 


지그로아가 고개를 갸웃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꽤나 짙어진 이목구비지만 얼핏 어린 얼굴이 보이며 이미 둥그스런 눈매가 더 동그랗게 떠져 의외로 귀엽다. 지그로아가 아침에 거울을 보고 연습한, 일부러 짓는 표정이었다.

 


"나에게 키스했잖아."
"그걸로?"
"그대가 키스할 때 난 매번 눈을 뜨고 있었어."

 


 지그로아의 말에 랄프가 혀를차며 얼핏 시선을 피한다. 매너없긴.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리는 랄프가 못내 시야에 들어와서 지그로아는 결국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덧붙인다. 그대의 속눈썹이 예뻤어. 꽤나 늠름했지. 사내다웠고.

 


"......."
"조금 기다리면, 난 그대가 보고 있는 이 모습 그대로 자라날거야."

 


 지그로아가 마구간 밖으로 이어진 긴 통로쪽, 빛이 들어오는 밖을 바라본다. 무심한 표정으로 말하는 지그로아는 랄프에게 생경한 모습이었다. 늘 그 눈동자는 강하게 빛나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똑바로 눈동자를 응시해왔다. 지그로아가 먼저 시선을 다른곳으로 한 것은 랄프에게 있어 처음 겪는 일이다. 지그로아는 나직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의 취향이 어떤지는 몰라. 하지만 그대의 취향으로 맞춰지는 일은 없을거란 얘기야. 대신 그대의 취향을 바뀌게 길들일거야."
"오만하군, 그리고 교만해."

 


랄프는 황당한 듯 혀를 차며 지그로아가 건낸 고삐를 받아들자, 지그로아가 빛을 바라보듯 멀리 주었던 시선을 움직여 또렷한 눈동자로 랄프를 바라본다.

 


"오히려 그대에게 이익이 아닌가?"


눈동자가 곱게 휘어진다. 랄프가 기억하는 붉은 눈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제 아귀에 넣어야만 만족할, 깊게 소용돌이치는 눈. 랄프가 귀엽다 생각하는 -이제까지 봐왔던- 소년다운 모습으로 가면을 쓰고, 방심을 하게 만들어 놓고는, 느슨해진 마음의 틈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나는 그대에게 내 옆에 있을 수 있는 기회와, 그대에게도 나를 길들 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거야."
"--!"  
"내가 하루의 시간을 갖은걸 승낙한 것은, 그대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그대가 나에게 나를 받아들인다는 말을 할, 용기를 가질 수있는 시간을 준거지."

 


비슷한 눈높이로 똑바로 랄프를 응시하며 지그로아는 순간 표정이 허물어졌다. 웃는 표정을 지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듯, 억지로 웃는 표정이 역력하다. 지그로아는 랄프가 잡은 고삐에서 천천히 자신의 손을 뗐다. 그리고 한 걸음, 랄프에게서 물러나 거리를 둔다.

 


"열심히 고민하고, 열심히 생각해봐, 랄프 워커. 그대가 치열하게 고민하여 내린 결론, 오늘 저녁에 받으러 갈테니까. 그대에게 너그러운 내가 그대에게 주는 인내심은, 그때까지야."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꾹 다물고있는 랄프를 남겨두고 지그로아는 이내 몸을 돌려 다른 일을 하러 마구간의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그 날 저녁.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지그로아는 다시 랄프의 방을 찾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을 열어주는 랄프를 보고 지그로아는 느긋히 웃었다. 지그로아의 옷이 랄프의 옷으로 바뀌었다는 것만 빼면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지그로아는 테이블의 의자에 앉고 랄프는 그 옆에 섰다. 

 


"잘 생각해 봤어?"
"......."

 


랄프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나오는 것은 한 숨 뿐이다. 
지그로아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섰다. 랄프와 할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바로 서자, 눈 높이가 같은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반 걸음 움직여 랄프에게 다가서자 랄프가 그만큼의 거리를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반걸음 다시 거리를 좁히자 랄프가 다시 뒤로 물러서다가 테이블위에 걸터 앉아진다. 

 


"내가 거절하면 어쩔 셈이지?"

 


물러설 곳이 없어지자 빠르게 피할 수 있는 동선을 셈하는 눈동자를 발견한다. 지그로아는 어제처럼 손을 뻗어 랄프의 왼쪽 손을 잡았다. 반지가 끼어져 있는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듯 깍지 꼈다. 그리곤 깍지를 끼고있는 랄프의 손을 끌어와 반지 반지위에 입을 맞췄다. 시선은 여전히 랄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대는 결혼할 수 없을걸?"
"하-?"
"레이디들과도 오래 사귀지 못할테지."
"권력을 사용할 셈인가? 가문의 이름을 등에 업고?"
"그대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 내 이름은 지그로아야. 그리고 지그로아 폰 아이델노크다. 내가 타고난 이름이고, 그 이름을 가진것이 나의 숙명이라면, 그것을 이용하는 것도 내 권리 아니겠어?"

 


 말을 마친 지그로아는 랄프가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그의 손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고, 남은 손으로 가슴을 강하게 밀었다. 중심을 잃은 랄프의 몸이 그대로 탁자위에 눕다시피 기대진다.  지그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랄프의 위로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내려다 보았다.

 


"...아이델노크. 무슨 생각이지?"
"놀랐어?"

 


지그로아는 귀여운척 고개를 갸웃해보이더니 짙게 웃는다. 부루퉁해보이는 표정이나 입술을 삐죽이던 모습에서 그래도, 속은 어린아이 그대로인 몸만 큰 애라고 생각했었는데, 속내를 드러내지않고 짙게 웃는 지그로아의 얼굴은 '남자'의 얼굴이다. 아무리 속내가 어린 그대로 일지라도 겉이 어른의 모습인 이상 변하는 뉘앙스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싶어 랄프는 흠칫했다. 오늘 오전 근무 때 부터의 지그로아는, 랄프가 알고 있던 지그로아와는 다른사람인 것 같았다.


지그로아는 힘이 세다. 비록 저번, 랄프와의 대련에서 져 힘에서 눌렸다는 오명을 썼지만, 그것은 순수한 힘의 차이라기보다는 키의 차이라는 요소가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힘으로 겨룬다면 랄프와도 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어린 모습일 때의 지그로아와 힘이 비등했다면, 지금의 지그로아는 어떨까. 랄프와 키가 비슷해진 지금이라면 힘으로 랄프가 쉽사리 지그로아를 당하내기른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하는 것은 처음이되겠네."

 


미안, 인내심은, 여기까지가 한계야. 지그로아는 몸을 숙여 랄프의 귓가에 작게 속살거렸다. 그리곤 짙게 웃었던 얼굴이 거짓말이라는 듯 수줍게 표정을 바꿨다. 급격한 표정의 변화에 랄프가 몸을 긴장시키려는 찰나, 지그로아의 손이 랄프의 얼굴 옆에 놓여져 몸을 지탱하더니- 지그로아의 그림자 뿐 아니라 긴 머리카락도, 랄프의 얼굴 위에 드리워진다.

 


"---!!"

 


입술이 겹쳤다. 위에서 찍어누르는 지그로아의 힘에 당황한 랄프가 잡혀있지 않은 팔을 휘젓자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화병이 떨어져 바닥을 구른다. 용케 깨지지 않은 화병이, 바닥을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그리고 그 화병에 담겨져 있던 물이 흘러나오며 바닥을 적시는 소리가, 겹쳐진 입술에서 세어나오는 소리 마냥 두 남자의 청각을 자극했다. 허공을 휘젓던 랄프의 손이 지그로아의 어깨를 움켜잡았고 지그로아는 그런 랄프의 호흡을 집어 삼켰다.


입술을 부비는 지그로아의 행동은 거칠고, 서투르지만, 집요했다. 강한 힘으로 움켜잡아진 어깨뼈가 조금 아프지만, 들이마시고 있는 뜨거운 공기가 마음에 든다. 깍지가 껴진 랄프의 왼손의 반지가 아플정도로 손가락을 압박한다. 그치만 땀이 찰정도로 뜨거운 손바닥의 체온은 놓고 싶지가 않다. 지그로아는, 기교없는 키스로 만족하리만큼 랄프의 입안을 맛보고, 헤집어 놓은 뒤에야 천천히 입술을 뗐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거리릴 두고 랄프의 코 끝에 자신의 코 끝을 부빈 지그로아가 달큰하게 속삭였다.  싫으면 발버둥쳐봐. 나를 걷어차고 밀어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나를 받아들여.

 

 


"그대를 원해, 랄프 워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