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01
따스한 봄이라 생각한 것이 불과 얼마 전 같았는데 어느새 목을 움츠리게 만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의 나는 한해가 다가면 나 또한 변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변한게 없는 것을 보면 나는 아직도 매미유충인가보다. 언제쯤 땅을 뚫고 나가 찬란한 빛 속에서 울어볼 것인가. 입김이 나오는 호흡이 부끄러워 목도리 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겨울동안 매미유충은 양분으로 삼은 나무의 뿌리가 자리 잡은 땅속에 함께 웅크리고 숨죽여 지낸다. 나도 그러할 것이다. 겨울 내 이불을 내 둥지 삼아 추위가 꽃바람을 싣고 올 때까지 웅크리고 숨죽여 지내겠지. 나는 추위에 약한 족속이라 더더욱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자신만이 있는 굴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여름을 기다릴 것이다. 언제고 돌아오는 계절이기에 인내를 새기며 기다려야 함을 알고 있지만, 한편으론 불안감이 든다. 시기를 깨닫지 못하고 이대로 썩어 문드러지는 것은 아닐까. 살아있는 채로 화석이 되어 죽어버리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쓸데없는 고민이야.”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맞춰주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Y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유난히 추위를 타지 않는 그는 초가을임에도 목도리를 두르기는커녕 얇은 긴팔의 티셔츠만 입고 있는게 고작이었다. 추위를 심하게 타는 나와는 반대다.
"쓸데없어?"
"그래."
"어디에도?"
아무 곳에도 쓸 수 없는 쓰레기 같은 고민이야. 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이는 Y의 시니컬한 말에 나는 기가 죽어버렸다. 그래도 나에게 소중한 고민인데, 라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비가 내렸다. 여름의 무더위를 식히는 비가 아닌 서늘한 공기를 몰고 오는 비에 온도가 급격히 떨어져 추워졌다. 나는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심야전기를 사용하는 작은 자취방은 낮에는 난방을 돌릴 수 없어 이불을 두르고 있지 않으면 체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밤에 난방을 돌린다 해도 바닥은 따뜻해 질 지언정 공기는 여전히 냉기를 머금고 자리할 것이다. 그것은 날씨가 더 추워질수록 더 차가워질 것이다.
Y는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이불 속이 땅 속 보금자리 인 것 처럼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아무것 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그런 추위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이불로 나의 굴을 만든다. 나를 감싸안고 동그랗게 웅크릴 수 있는 나만의 둥지.
지금껏 길러왔던 유충이, 매매의 유충이 아니고, 굼벵이이고, 이 굼벵이는 매미가 되지 않고, 사슴벌레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성충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알 수 없는 혼란감이 찾아왔다. 사실 이 굼벵이가 매미유충이 아니더라고, 굼벵이임은 변하지 않고, 그것이 내 인생에 결코 어떠한 영향을 주지도 못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나에게 있어 크나큰 충격이었다.
여름이 되면, 이 굼벵이가 탈피하여 번데기를 거치치 않고 성충이 되면 그 뜨거운 햇살 아래서 자신의 마지막 남은 삶을 불태워 찬란하게 목 놓아 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기대로 시간들을 인내해 왔는데, 기껏 비명소리 하나 내지르지 못하는 사슴벌레가 된다니, 멀쩡하게 잘 살다가 성대를 절단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은 환자의 심정이 이러할까.
날이 서늘해지고 더 이상 반팔 티를 입고 다닐 수 없는 날씨가 되었다. 목을 움츠리고 소매가 긴 옷을 챙겨 입었다. 옷의 두께가 두 배는 늘어나고 발걸음의 무게는 세배나 늘어났다. 처음의 하나는 내 몸뚱이의 무게고, 다른 하나는 옷의 무게고, 마지막 하나는 내 마음의 무게였다. 새벽 내 내렸던 비는 공기를 어찌나 서늘하게 만들었는지 숨을 내 쉴 때마다 부옇게 입김을 만들어 냈다. 이불 속에 눈을 감고 웅크리고 있고만 싶었지만 비가 내린 후의 땅은 너무나 단단해져서 뚫고 나오기가 힘들어 진다. 나를 둘러싼 흙이 더 두껍고, 단단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나를 감싼 흙을 부드럽게 해둬야지 싶었다. 아니, 사실은 전부 핑계다. 나올 구실이 필요했던건 나지만, 그런 나에게 적절하게 구실을 제실한건 Y였다.
Y와 밖에서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나왔다는 마음이 강해서일까, 내딛어지는 걸음이 복잡하게 엉킨 마음의 그림자를 더욱 흐트려 놓는다.
-바삭, 하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가장 높은 곳에서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 심장이 철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딛은 발은 움직이지 않고 온전히 땅에 딛어져 있는데 땅이 밑으로 꺼져버린것만 같았다. 발을 들고 그 밑을 확인해 보면 무엇이 있는지 확인 해 볼 수 있을텐데도 나는 굳어버린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면 나를 유지하는 페스추리같은 수많은 막 하나가 부셔져 버릴 것 같았다.
발을 들자 페스추리같은 얇은 막으로 된 갈색 잔해가 부셔져 있었다.
들릴 리 없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껍질을 잃어버린 매미가 울었다. 매앰, 매앰, 귓가에 맴돌았다. 그 울음이 한 없이 처량해서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Y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약속시간이 가까워져 감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서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이제는 결코 여름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추워서 몸을 웅크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은 여름의 그것처럼 뜨겁고 짰지만, 곧 그것은 바람에 말라버려 염전의 소금처럼 시체만 남겼다.
바람은 눈물 뿐 아니라 낙엽까지도 흩날린다. 바람이 불 때 마다 앙상하고 매 마른 나뭇가지가 목 놓아 낙엽을 떨어트린다. 길고 긴 기다림의 시간을 넘어, 이제 겨울이 되었다.
나는 이제 매미 유충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