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침묵의기사단

[에스파다/지그로아] 입단 - 빛을 잡아먹는 남자

이기님 2010. 2. 23. 23:09

 


 지그로아가 방안에 들어와 그가 앉아있는 곳에서 이미터 남짓의 거리를 두고 서는 동안에도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조용이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흐트러진 종이들과 조금 피곤해보이는 얼굴. 그리고 방해받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한 그의 분위기에 지그로아는 채근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짧은 휴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남자가 등지고 있는 창문으로 오후의 햇살이 부서지며 검은색 머리카락위에 흩뿌려진다. 부서진 햇살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반짝이며 빛났다. 자신과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지만 저 남자만은 특별한듯, 빛을 탐욕스레 집어삼키고 무언가의 검은 괴물처럼 그에게 도사리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다보고있느라 내리깔아진 눈꺼풀이 걷어올려지고 그의 눈을 보면 그에게 머물러 있는 괴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침묵속에서 그는 차를 다 마실 동안 단 한번도 지그로아를 바라보지 않았다. 
 
곧게 허리를 세우고 어깨를 폈다. 턱을 조금 당겨 숙이고 시선은 조용히 눈 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의심도, 불만도, 기대도 없이, 그가 인간이 아니라 동화책에서나 나올법한 괴기한 짐승이라 한다하여도 그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십여분정도 시간이 흐른것 같았다. 정확한 시간의 흐름을 채 느끼지 못한채 그냥 고요하고 평온하게 한 사람은 차를 마시고, 한 사람은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차를 다 마신 남자가 찻잔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달칵, 하는 다기가 마찰하는 소리가 조용하던 방안을 울리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로시오는 잠시 차를 마신 여운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제서야 지그로아는 자신의 차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눈을 뜨고 바로 올곶게 정면에 자리한 지그로아를 바라보는 로시오의 눈동자는 유리알처럼 번들거리고, 무척, 까맸다.

"하이델노크가의 지그로아입니다."
"하이델노크? 아직도 기사가 남아있는 곳이던가."




 하이델노크가는 원래 기사가문이었다. 지그로아의 증조부 때 기사단의 전통을 유지하는 세력과 정치에 뜻을 둔 문벌을 중시하는 세력으로 파벌이 나뉘어 휘청이던 이 후, 지그로아의 할아버지가 되는 라지노센 폰 하이델노큭 기사의 뜻을 잇는 것으로 다시 제 명맥이 유지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지그로아의 아버지, 즉 하이델노크가의 현 가주는 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교활하고 능수능란한 언변을 가졌고, 정치가 아닌 외교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이긴 했으나 정치가로서의 타고난 능력은 지그로아조차 그저 입을 다물고 수긍하게 만든다. 지금의 지그로아의 나이때에 그의 아버지는 정계에 나서기위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왕가에대하 고지식한 충성이 그를 변질되게 하지는 않을 것이란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그가 자신의 능력을 살려 정치계진입으로 기사가문이라기보다는 정치가로 더 알려져 자리잡게 된 것이 이미 십여년전의 일이다. 

 지그로아는 작게 웃었다. 이래서는 마치 정치가로 두곽을 드러내고 있는 가문과 차기가주-지그로아의 배다른 형-를 피해 도망쳐온 꼴로 보이지 않은다. 지그로아는 어릴때부터 친 형을 따라 검을 잡아왔다. 검을 수련한다는 명목하에 자신의 파괴적 본성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을 기쁨으로, 그리고 수련을 하면서 그런 스스로를 다스리기위해, 가문과는 관계없이 지그로아는 자신이 검을 잡아야만 했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도가 뒤집혀진 가문의 상황은 자신의 상황을 편협한 오해에 쌓이게 만든다.




기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당신의 수족으로 부리시면 됩니다. 그곳이 그늘진 자리든, 밝은 자리든 신경쓰지 않을겁니다. 저는 그러기 위해 이 기사단에 들어왔고, 당신께선 그저 부리시기만하면 됩니다.

지그로아의 말에 로시오가 한쪽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유쾌한듯 웃었다.

"일회용의 쓰레기가 되고 싶다는 말인가? 뭔가 잘못생각하고 있군."

로시오의 말에 지그로아가 올려다 보았다.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어린 청년의 눈동자는 불쾌할정도로 순종적이어서 로시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필요한 것은 '기사' 다. 실력에 흠잡을 것이 없고, 이미 기사단에 종속되었으니 뭐라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 안굴러가는 머리로 다시 생각이란걸 좀 해보는게 좋을거다. 넌 '기사'에 어울리는 자인가?"

지그로아는 문득 눈앞의 사내가 생각했던 것 처럼 잔혹한 인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인 스스로에게 자부심과 긍지가있다. 로시오의 말을 입안으로 되새겼다. 나는 기사에 어울리는 자인가.


지그로아는 로시오의 집무실에 들어서 처음으로 제 나이다운 어린 미소를 지었다.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갈망한다, 라는 말을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지그로아는 기사가 되고 싶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위해, 열망을 위해, 스스로를 다스리기위해. 그리고, 눈 앞에 괴물을 품은 남자를, 지켜보기위해.  괴물을 품고있다고, 짐승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 강한 남자의 행보를 지켜보고싶다. 속을 알 수 없이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비추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이 남자라면 자신이 상관으로 모시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에 어울리는 자란 과연 어떤 자인가. 정말 이상적인 '기사'는 눈 앞에 있는 이 남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처럼 되고 싶다. 그러니 지그로아는 기사가 되고 싶은것이 옳았다.
 
"그렇다면-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로시오가 등지고 있는 창문 밖으로, 해가 저물어 지하로 숨어들고 있었다. 로시오가 내려놓은 하얀 찻잔이 점점 저무는 해의 빛을 반사해 붉게 빛났다. 목표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않고 수초만에 스스로를 납득해보이는 교활한 소년의 붉은 눈동자도 천진하게 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