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로아] 부러지다
선잠을 자다가 깼다. 게르트루드인의 역습이었다. 원정을 온 이상 편히 눈을 감고 잠잘 순 없을 거란걸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다음날 바로 진영을 가다듬어 공격해 올 줄을 몰랐던 터라 지그로아는 짜증을 담아 혀를 찼다.
간이 침대에서 신경질적인 놀림으로 벌떡 침상에서 일어난 지그로아는 근처에서 검을 챙기고 있는 랄프를 바라보았다. 랄프는 잠을 잔 흔적이라곤 없는 모습으로 검을 뽑아든다. 지그로아도 품에 안고 잤던 에스터크 와 침대 맡에 놓았던 롱소드두자루, 바스타드 한 자루까지 챙겨 일어섰다. 막사의 밖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그로아 폰 아이델노크]
부러지다
랄프는 검 한자루를 가지고도 잘도 싸웠다. 지그로아도 자신이 가장 잘 다루는 검은 에스터크 였으나 에스터크는 한손과 양손을 오가며 사용하기때문에 검 한자루만 가지고 저렇게 버티는 이들을 보면 무척 신기했다. 지그로아는 양 손에 한자루씩 잡혀있는 롱소드를 번갈가며 휘두르다가 그렇게 하면 체력소모가 심하다는 것을 깨닫곤 왼손으론 공격을, 오른손으로는 방어를 하는 방법으로 바꾸어 게르트루드인들을 상대했다.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해 팔이 조금 무거웠지만 투정을 할 틈은 없었다.
게르트루드 기사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듯 무척이나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근래에 부쩍 몸이 성장하고 있는 지그로아는 그와 비례하여 세진 근력을 이용해 자신의 시야 오른쪽에서 대검을 들고 달려드는 게르트루드기사의 오른쪽 팔목을 베었다. 오른손으로 방어를 하는 척하다가 몸을 틀어 왼손에 들린 검으로 팔목이 베일줄은 몰랐는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검을 쥔채로 나가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팔을 무심하게 흘끗 바라보곤 다시 기사의 목을 벤다.
게르트루드인은 눈동자가 붉다 했었지. 죽어가는 이들의 눈동자도 전부 색을 잃어 그들의 눈동자가 말하는 감정이 전부 명백하게 드러났다. 분노라던가, 절망이라던가, 두려움이라던가. 혹은-.
지그로아는 사람을 죽이는 데 자체엔 죄책감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기사를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지그로아에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오직 -어두운 난전 속에서- 함께 자리하고 있다가 점점 멀어지는 보라색 머리카락이었다. 지그로아가 그에게 가까이 가려고 몸을 움직일때마다 게르트루드 기사가 진로를 방해해왔다. 가다듬을 틈 없이 계속 거칠게 사용된 롱소드가 충격에 이가 나갔다. 그것이 몇번이나 반복되자 점점 짜증이 치솟았다.
* * *
무식한 힘이다. 힘에서는 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온 지그로아지만, 나름 아껴온 검에 이가 나가고 팔뚝이 얼얼할 정도로의 공격을 받아본것은 처음이었다. 공격한 검을 바로 회수한 게르트루드인 기사가 이번에는 횡으로 지그로아를 베어왔다. 닥치는대로 베고 난투를 벌이며 랄프와 제법 가까워졌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게르트루드인 기사는 -눈에 띄게 부쩍 부쩍 키가 크고 있는- 지그로아보다도 한뼘은 더 큰것 같은 사내였다. 마주친 눈동자는 무슨색인지 모르는 오묘한 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지그로아는 게르트루드인의 검을 오른손의 롱소드를 세워 막아냈다. 그의 검을 막은 오른손이 팔꿈치까지 저려와 지그로아는 웃었다. 그리고 피하지 않고 게르트루드인과 눈을 마주한다. 너도 붉은 눈을 가지고 있느냐. 네 몸속에 흐르는 그 붉은 피가 그 붉음을 증명하고 있느냐. 지그로아의 붉은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알 수 없는 게르트루드인 기사의 눈동자가 지그로아에게 정확히 인지된다.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신경전이기 때문이었다. 먼저 눈을 피하는 자의 의지가 더 약하다는 신경전.
게르트루드인 기사의 검이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지그로아를 베어온다. 이가 나간 오른손의 롱소드를 가로 눕펴 가드로 검을 막으려 시도했으나 그의 힘이 강한 탓에 검이 기울어져 검의 끝쪽으로 긁혀내려갔다. 쇠가 긁히는 불쾌한 소리가 지그로아의 신경을 자극한다. 그리고 이가 나갔던 부분에 게르트루드인 기사의 검이 걸렸다. 기사는 그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을 작게 퉁겨 몸을 떼는가 싶더니 바로 땅을 박차고 지그로아에게 달려들었다.
몸을 미처 뒤로 빼지 못했던 지그로아는 게르트루드인 기사의 검과 다시한번 오른손의 검을 맞부딪치고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자 이번엔 그로아가 조금 무리해 게르트루드인의 검을 퉁겨 자세를 가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완력이 강한 그는 다리의 힘으로 퉁겨나가는 것을 버티고 다시 지그로아의 검에 자신의 검을 부딪힌다. 챙, 챙, 챙 하는 소리가 빠르게 연달아 났다.
지그로아는 게르트루드인 기사와 검을 몇번 계속 마주 하면서 자신의 이가 나간 롱 소드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의 균형이 묘하게 흐트러지고 검에는 이가나간 곳에서부터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그로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냥 상대하던 이들과는 달리 이자는 제법 실력이 있는 자다. 길게 끌어봤자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 지그로아는 그와의 대치를 빨리 끝내기로 결정하고 머릿속에서 빠르게 셈을 했다.
그 시간을 허용하지 않겠다는듯 게르트루드인의 검이 이번엔 깊게 찔러들어온다. 지그로아는 몸을 숙이며 그의 검을 막는 척 하다 왼손을 길게 뻗어 손에 들린 롱 소드로 그의 허리를 벤다. 게르트루드인 기사는 급하게 뒤로 몸을 젖히며 피하는 대신 찌르고 있는 상태에서 경로를 바꾸어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친다. 지그로아는 그가 왼손에 들린 검을 내리치는 순간 손잡이를 손에서 놓고 허리에 매인 바스타드를 뽑아 비어있는 그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찰나의 시간에 이루어진 이 일련의행동에 게르트루드인 기사의 목과 어깨에 반쯤 바스타드소드가 박혔다. 그 느낌을 손으로 느끼며 안심하려는 순간, 게르트루드인 기사의 검이 다시 아래서 위로 대각선을 그리며 베어올라왔다.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고개를 크게 젖혀 피했지만 오른쪽 볼을 가로로 엷게 베이는 상처가 만들어진다. 조금만 덜 고개를 젖혔으면 큰일 날 뻔 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던 듯 게르트루드인 기사는 눈동자에 빛을 잃고 바닥으로 몸을 쓰러트렸다. 지그로아는 숨을 골랐다. 마음이 흐트러지는건 일어나지 않았으나 대신 호흡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기사의 몸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지그로아는 그의 목과 어깨 중간사이즈음에 박혀 있는 자신의 바스타드를 뽑아냈다. 그러자 등을 보이며 완전히 바닥에 쓰러진 기사의 아래로 목을 중심으로 피가 웅덩이를 만들며 번져나간다. 이것이 죽음이다. 기사의 죽음은 전장에서 이루어져야 명예롭다. -비록 이 자리에 쓰러진 그가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는 분명 명예롭게 죽었다.
지그로아는 호흡을 골랐다. 문득 검신이 부러진 자신의 롱소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미련없이 바닥에 내 버렸다. 롱소드는 쓰러진 기사의 옆쪽에 볼품없이 내꽂혔다. 대신 대충 들고 있던 바스타드를 왼손에 제대로 고쳐 쥐었다. 다수를 상대하는 이상 이왕이면 휘두를때 팔에 힘이 덜드는 가벼운 롱소드가 좋겠지만 부러진 검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지그로아는 이번엔 놓아버려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롱소드를 주워들었다. 아무리 젊은 나이라지만 노련함이나 능숙함에 다다르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렇기에 더 의식해서 호흡을 골랐다.
지그로아는 몸을 돌려 다시 난전속으로 뛰어들었다. 멀리서 보라색 머리카락이 보인다.
아직 이곳엔 쓸모있는 검들이 잔뜩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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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뭐라고 쓴건지 모르겠서여...aㅏ.....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