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18 주제 Ss 쓰기
10. 니 맘 속에 다른 사랑이 사는데 내게 하는 말은 달콤한 거짓말
"...괜찮습니까?"
남자는 리히트를 한번 흘끗 바라보았다. 꽃 다발을 엉거주춤하게 품에 끌어 안은 이 요령없는 녀석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검을 쥐고 달려 들었는지 기억한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날아가 얼굴을 쳐버린건 미안하게 생각하고있지만, 자신이 아니라 리히트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시 그의 의중을 살피려 눈을 응시해야 했다. 무슨 생각으로 괜찮느냐는 말을 묻는 것인가. 이 고지식한 녀석이 마음에 쌓여있던 제 음험한 상태를 알아차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 그럴리 없었다. 남자는 자신이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제 속마음을 감추고 꾸며 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험악한 인상을 더욱 찌푸리곤 혀를 찼다.
"괜찮아."
말에는 힘이 있다. 사랑스럽다 속삭이면 정말로 사랑스러워진다. 그래서 시작했던 이 거짓말이 이제 제법 효력을 발휘하는지 정말로 조금 괜찮아 진 것 같다. 그러니 괜찮다. 더 이상 없는 사람을 위해 장신구를 주머니에 넣지 않는다. 꽃을 보면 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지만, 어쩐지 고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될대로 되라는 마음도 없지않아 있었다. 리히트는 사내의 대답에 조금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숙이며 꽃다발에 얼굴을 묻었다.
주제넘게 굴었다면 죄송합니다. 라고 웅얼거리는게 오랜만에 제 나이처럼 보여서 남자는 손을 뻗으 리히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흐트러트렸다. 어린 후배의 상냥한 마음에 곤두섰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남자는 이번엔 제법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괜찮아."
25. 강요되는 우아함
애도를 표하는 조문객들이 저택을 찾아왔다. 상처한 남자는 조문객을 맞이하기위해 자꾸만 굽어지는 몸을 고쳐 세워야했다. 허리와 어깨를 펴고 턱은 조금 당긴다. 크라바트가 매어지고, 상중이라 매지 않는 검 대신에 장식이 들어간 허리띠를 둘렀다. 부인의 바람으로 길렀던 머리는 목 뒤에서 단정히 묶고, 외투는 상중을 표하는 검은색으로 입혀진다. 손을 뻗자 남자를 모시는데 익숙한 시중인이 두 줄의 장식선이 들어간 흰 장갑을 끼워주었다. 남자는 이제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이 장갑을 벗지 않을 것이다. 상중임을 표하는 가문 특유의 표식이기도 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시중인의 손에 몸을 맡긴채 그는 오늘 찾아오는 조문 명단을 무미하게 떠올렸다. 장모와 아내의 남동생이 온다고 했던가. 장모는 양파수프에 갓 구운 빵을 찍어먹는 것을 좋아했다. 남자는 간단한 손짓으로 시중인을 불러 저녁에는 양파수프를 올리라 말했다. 옷매무새를 다 다듬었는지 명을 듣고 물러간 시중인 뒤로 향수를 손에 든 시중인이 남자의 곁에 다가왔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한 시중인이 남자의 몸에 옅게 향수를 뿌린다.
"주인님, 에블라인 가문에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시간을 맞추기라도 한 듯,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한 조문객의 방문을 알린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장이 막 끝난 그는 무척 절제되어 보이고, 또한 귀족다웠다. 평상시보다 예의를 차리를 복장. 남자는 제 눈으로도 꼼꼼히 저를 살피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조문객을 응접실로 안내하라 전했다.
조용한 저택이었지만 시종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손님들이 방문하는 만큼 실수를 하게 되면 제 주인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는만큼 그들은 평소보다 더 조용하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일터이다. 남자는 늘 제 허리께에 매달려 있었으나, 오늘만큼은 풀어져 벽에 기대져 있는 제 검을 바라보았다. 고정끈을 바닥에 늘어뜨리고 맥없이, 그러나 꼿꼿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제 모습 같았다. 남자는 곧, 몸을 돌려 발을 내딛었다.
"응접실로 내려간다."
남자의 뒤로 허리를 숙인 시중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3. 뒷모습
남자가 처음 여자를 본 것은 뒷모습이었다. 작은 키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긴장한 듯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남자는 그 뒷모습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깜짝 놀란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남자의 가슴께를 보더니 점점 얼굴을 향해 올라왔다. 남자가 이토록 키가 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순수하게 감탄하던 그녀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번 깜짝 놀라며 앙큼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눈가가 붉어지며 부끄러운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안녕하세요, 니아님 경."
"곧 부부가 될 사이이니 이름을 불러도 좋소."
남자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새앙쥐를 보는 것 같았다. 크고 둥그스런 눈매에, 화들짝 화들짝 놀라는 것이 담력도 작은 것 같다. 남자는 흠, 하고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이런 여자와 평탄한 부부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조금 걱정되었으나 이미 혼약이 결정된 상태이니 이제와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초상화로 보던 것 보다 더 여린 인상. 남자는 눈매를 가늘게하고 여자를 빤히 관찰했다. 남자의 시선이 움직이면 여자의 손이 꼼질거리며 곤란함을 표했다. 그러다 용기를 냈는지 손이 주먹을 옹골지게 지곤 남자를 불렀다.
"저.. 시라, 경."
남자는 그녀의 부름에 의아한 듯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바로 호칭을 고쳐 부를 만큼 대담해 보이지는 않았건만 여자는 똘망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 본다. 그리고 곧 무언가 생각 난 듯, 옆 테이블에서 무언가를 집어 남자에게 건냈다.
"꽃?"
"후리지아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랍니다."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은 조금 목소리가 작았다. 남자는 기가차 여자를 보았다. 마냥 울보새끼쥐일것 같던 여자가 의외로 강단있다. 그리고 참 의외였다. 꽃은 내가 건냈어야 할것 같은데, 남자가 꽃을 한 손에 받아들이며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었다기보다는 어이 없다는 한숨에 가까운 느낌이었으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긴 했다. 그것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여자는 곧 남자의 웃음에 환하게 마주 웃었다.
"그럼 다음에 많이 주세요."
제가 옆에 서면 가려서 맞은 편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작은 체구면서 자신을 보고 웃는 대담함은 어디에 넣어 두었던 것일까. 남자는 꽃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그 꽃다발 중 한송이를 뽑아 여자의 귓가에 살며시 꽂아주었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프리메라."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부부생활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