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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2009.11.25 pm 03:41)

2009. 12. 19. 06:00 | Posted by 이기님


"나비."

"응?"

나비는 문득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사랑하는 사람을 꼭 빼닮은- 어린 청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꼭 빼닮은 건 외모 뿐 아니라 성격도 마찬가지지만, 라드보다는 아드가 조금 더 곰살 맞은 구석이 있다.

"생일 선물이에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건네는 상자는 따로 화려한 포장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제법 깔끔하게 리본으로 묶여 있다. 나비는 볼이 발그스레해지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생각도 못한 선물에 놀라 선물과 아드를 번갈아 바라보는데 아드가 웃으며 열어보라는 시늉을 했다.

"저녁에 아버지랑 데이트하러 가시죠?"

어울리실거에요. 라고 덧붙이는 말에 조심조심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어보자 앙증맞은 코사지가 달린 펌프스 구두가 들어있었다. 굽이 조금 높은 것 같지만 앞 굽을 만져보니 가부시 굽이 있어 도전해볼만한 높이 같았다.

"고마워, 아드. 진짜 예쁘다!"

와락 팔을 뻗어 아드를 안아주는 나비의 반응에 아드가 슬쩍 몸을 낮춰 안기 편하게 해준다. 사실 이런 악세사리에 크게 신경을 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날 특별히 마련된 선물은 더할 나위 없이 빛나 보이기 마련이다.

아드는 소녀처럼 기뻐하는 나비를 진정 시키며 품에서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어머니의 품도 좋지만 그래서야 아직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을 회사의 아버지에게 죄송하게 된다.

"아버지랑 멋진 데이트 하고 오세요."

응! 하고 밝게 웃는 얼굴에 아드도 같이 웃었다.

작년 생일 때 라드가 사준 원피스와 세트인 양 어울리는 굽 높은 구두는 색이 예쁘게 나온 실크 스타킹까지 완벽하게 세팅하자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전에 없이 높은 시야에 우쭐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 높이면 라드와 키스 할 때도…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하며 꺄꺄거린 나비는 당당한 걸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머리도 라드가 최근 가장 좋아하는 것 같은 긴 머리를 예쁘게 빗어서 살짝 드라이해 해팅했고, 스타킹도 올 나간 곳 없고, 화장도 산뜻하게 오케이. 아이들을 가지면서 단 둘이 밖에서 만나 데이트 하는 건 진짜 오랜만이라 마음이 더 들뜨는 것 같다. 라드를 만나기로 한 회사 근처 시계탑 꼭지가 보이자 마음이 바빠진다. 그리고 곧, 약속 시간이 아직 남았음에도 시계탑 앞에 서 있는 한 인형을 발견했다.

"라-드!"

이름을 부르자 라드가 나비가 있는 쪽을 바라본다. 바쁜 와중에 언제 준비했는지 품에 안고 있는 꽃다발에 마음가득 우쭐한 행복감이 차올라 구두를 신은 것도 잊고 종종종 빠르게 내딛었다. 이 정도는 괜찮은 것 같은…데?

"에!?"

라드에게 다와서 속도를 줄이고 안심하려는 찰나 시선이 흔들렸다. 그리곤 급하게 나비의 허리를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 안아 중심을 잡아주는 라드 덕에 겨우 시선이 똑바라진다.

"…조심해야지, 나비."

조금 나무라는 듯 하지만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와 올려다보자 라드가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그러나 전 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서 자신을 내려다 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얼굴 사이의 간격이 줄면 이렇게 보이는 구나 싶어 두근거리면서도 방심했던 차에 일어난 아찔한 사건에 두 눈을 꿈벅거리고 있자 라드가 나비를 바로 세워 주곤 여기저기 다친곳이 있는지를 살핀다.

"나비?"

괜찮냐고 묻는 다정한 목소리에 다시 두 눈을 꿈벅 거렸다.

"아… 놀랐어."

나도 놀랐어. 라고 한 숨 같은 웃음을 짓는 라드를 다시 올려다 보려니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예쁘게 보이려고 구두신고 왔다가 개구리처럼 자빠질뻔 했으니. 미수에 그쳐서 정말 다행이다.

나비가 인상 쓰는 것을 무어라 생각했는지 라드가 피식 웃으며 나비의 등을 다독여 준다. 그리곤 나비를 잡느라 놓쳤던 꽃 다발을 주워 나비의 품에 안겨준다.

"생일 축하해, 나비."

그 말을 신호로 잠시 멈추었던 나비의 사고가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울상처럼 찡그려졌던 얼굴이 금새 환하게 피어나며 폴짝 라드의 목에 매달려 안긴다.

"고마워 라드!"

그런 나비가 싫지 않은지 가볍게 나비의 허리를 끌어안아 지탱해주던 라드가 조심히 나비를 땅에 내려주며 아까 사건의 원흉인 구두를 흘끗 바라보았다. 처음보는 구두는 전에 없이 굽이 높은 구두였다. 아마도 그 때문에 스템 조절에 실패해 넘어질 뻔 했나보다.

"오늘, 예뻐."

"어? 어제랑 그제는 안예뻤어?"

제 ㅍ페이스로 돌아온 나비가 새침하게 말하자 라드가 웃었다. 아마도 오늘이 더 예쁜것 같아. 라고 솔직하게 말하자 나비가 우쭐한 표정을 짓는다. 라드가 나비를 부드럽게 에스코트하며 걸음을 옮기자 나비가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아드가 라드랑 데이트하러 간다고 선물 해줬어."

예쁘지? 하고 구두를 자랑하듯 통통 거리더니 이내 다시 걸음이 불안하게 흔들려 라드의 팔에 답싹 매달린다.

"우으…."

이게 아닌데, 라고 웅얼거리는 모습에 라드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천천히. 시간은 많으니까."

라드가 나비의 손을 이끌어 온전히 자신의 팔에 팔짱을 끼고 매달릴 수 있게 고쳐주자 나비가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는다. 걸음이 내 딛어질 때 마다 구두의 코자시가 팔랑거렸다. 라드가 두 걸음 걸을 때 나비가 세 걸음을 내 딛는다. 걸음의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지만 그 걸음은 왈츠를 추는 양 부드럽고 유쾌하다.

"자, 가실까요, 아가씨?"

라드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비가 동그랗게 뜨더니 말갛게 웃었다.

"기꺼히 가구 말구요, 신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