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파랗고 높으며, 햇살은 따뜻했다. 남자가 좋아하지 않는 날씨였다. 오늘은 밖에 나가지 않을 셈이었다. 대신 돌아오는 길에 리히트에게 빌린 책이나 읽을 생각으로 침대에 기대듯 앉았는데.
"미야아-"
저것이 문제로다. 룸메이트가 씻으러 욕실로 사라진 틈을 타 남자의 시야에 침범한 저 무법자는 무서운 줄 모르고 남자의 침대위에 기어올라오려고 발버둥이었다. 아직 새끼인 녀석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어쩐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제가 누워있던 곳이 아닌 다른 침대가 궁금했는지 굴러 떨어지듯 룸메이트의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망설이지도 않고 남자가 헤드에 기대듯 앉아있는 침대 위로 필사적으로 올라오려고 매달려 있는거다. 물론 남자는 구경만했다.
놈이 다시 미야미야 울며 남자를 올려다 봤다. 남자는 펼쳐든 책을 그대로 둔 채 턱을 괸채 놈을 구경했다. 저기 저러고 있는 녀석의 이마를 조금 밀면 그대로 나가 떨어져 구를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어서 해볼까, 싶었으나 몸을 움직이는게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여자에게는 상냥하게 대해야죠."
어느새 씻고나온 룸메이트가 샤워실 앞에서 물기를 털어내며 남자를 타박했다. 대충 바지만 꿰 입고 상의는 맨몸이다. 제법 만들어진 몸에는 훈련을 하며 다친 작은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그래도 자기관리 열심히하는 놈 답게 제법 볼만 한 모양새다. 룸메이트는 어깨에 수건을 걸친 채 성큼성큼 남자의 침대로 걸어왔다. 녀석이 움직일 때 마다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바닥에 얼룩을 만들어낸다.
"암컷이냐."
"이 탐스러운 꼬리하며 윤기가 흐르는 털, 어딜 봐도 여자애죠. 그러니까 좀 더 부드럽게 대해주세요."
퍽이나, 하고 남자는 룸메이트를 비웃었다. 남자의 룸메이트는 고양이에대해 말할 때 만은 무척 상냥해지지만 사람에게는 평가가 짜다. 그것은 남자에게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남자의 손에서 고양이를 낚아채 자신의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 놓는 모양새가 꼭 제 애인 욕을 들은 소심한 남자같았다.
뒷머리만 긴 머리카락을 앞으로 끌어와 수건으로 꾹꾹 누르며 물기를 닦는 룸메이트를 보며 남자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대뜸 시비를 걸었다.
"그럼 네 윤기흐르는 꼬리털도 암컷의 상징이냐."
"...그거 진담이세요?.."
허, 하는 한탄 같은 추임새를 낸 룸메이트가 황당함에 물든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평상시 느른하게 늘어져 있는 눈매가 이럴 때 만은 제법 사내다워지길 망설이지 않는다. 눈 앞에 있는게 전 부터 알던 사이라고 참 숨김없이 불편한 마음을 드러내는 게 솔직하고 발칙한 속알머리다. 물론 그래봤자, 예전 부터 익숙한 어린 얼굴이 지금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어서 하나도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뭐, 제 머리결이 그만하다고는 생각안하지만, 칭찬으로 듣죠."
그러나 룸메이트는 남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제법 침착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남자는 룸메이트가 자신의 머리카락에 비유된게 고양이 꼬리니 저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거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만약, 개꼬리나, 여타 다른 짐승의 꼬리를 말했으면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덤벼들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나이를 제법 먹어서 점잖은 척 하지만, 더 나이가 어렸을 때에는 한 성깔 한다며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무어라 그리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지 진짜 아기고양이가 냥냥 거리는것 같아 참 경박스럽고, 귀여웠었다. 그 귀여움에 시라도 어린 시절의 그를 참 많이 예뻐해주기도 했다. 연무장에서.
빌어먹을, 농담이 안통하는군, 하고 따분하게 중얼거린 남자는 조언했다.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쳐라, 키티."
"농담이 농담 다워야죠. 게다가 나름 농담으로 받아친건데요."
투덜거리면서도 후배로써 선배에게 대드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남자는 그것이 아쉬웠다. 해가 쨍쨍하니 기분이 좋지 않아서 어린 룸메이트가 바락 대들기라도 하면 조금 재미있을 것 같았으나, 나이를 먹어 같이 늙어버린 녀석은 풋풋함이 모자라다. 길가에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혈기가 넘쳐 주먹을 말아쥐던 일은 과거에 불과한 것이다. 재미 없어진 남자는 룸메이트를 놀리려던 것을 깔끔히 포기하고, 읽으려던 책이나 마저 읽기로 했다.
"그보다, 이건 뭐에요?"
내년이면 삼십줄인 늙은 룸메이트가 늙은이 답지 않게 호기심에 충만에 녹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남자는 책을 펼쳐놓고 흘끗, 룸메이트를 보았다. 손바닥 위에 올라올 만한 작은 화분이 방 가운데의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남자가 해 아래 나가는 것이 싫어 해를 받던 말던 테이블에 올려 놓은 탓에, 반은 햍 볕 아래 걸쳐 있고 반은 그늘에 놓여져 화분의 풀잎은 해를 향해 기울어진 모양새를 하고 자라 있었다.
남자는 대충 그것이 허브임을 알려주었다. 간간히 후리지아를 파는 상인이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덤으로 떠안겨 준 것이었다. 수건을 대충 목에 건 룸메이트는 화분을 들어 얼굴 가까이 가져가 향을 맡았다. 그리곤 퍽 마음에 드는지 요리조리 들여다 본다. 남자는 그 모양새를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룸메이트에게 먹어도 되는 식용 풀임을 알려주었다.
"잎을 뜯어서 그냥 씹어 먹어도 된다더라."
"어, 이걸 그냥 생으로요?"
"먹어봐."
남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권하자 룸메이트는 화분을 들어 볕이 잘드는 창가에 올려 놓고는 어색하게 줄기 조금을 뜯어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진짜 먹어도 되는건지 고민하는 기색에 남자는 턱짓으로 먹어보라는 시늉을 했다. 늙은 룸메이트는 더 이상 늙은이가 아닌 얼굴을 하고 조심스럽게 이파리를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본다.
"아, 제법 괜찮네요."
쌉쌀한 풀 맛이 제법 마음에 들었나보다. 룸메이트는 줄기 조금을 더 뜯어 입안에 집어 넣었다. 우물우물 씹는다. 그리고 꼴깍 목구멍으로 삼켰다. 남자는 그 꼴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너무 진지해서 파들파들 떨리는 입 주변의 근육을 컨트롤하여 멋지게 웃음을 참아내는데 성공하였으나, 룸메이트가 곧 뿌듯한 얼굴로 해를 잘 못받던 부분이 더 해를 잘받으라고 화분을 돌려주는 모양새를 보고는 결국 음험하게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왜그러세요."
"아니, 역시 키티는 키티다 싶어서."
룸메이트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키티라는 별명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이유도 모른채 키티키티 소리를 들어 다시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흘겨보더니 이내 흥, 하는 같잖은 소리를 내며 뒤돌아 제 침대 자리로 가버린다.
"큭큭.."
상큼한 향이 나는 허브, 캣글라스. 고양이들의 소화에 도움을 준다고 했던가. 고양이들이 생으로 잘 씹어 먹는 풀이래서 등산놀이나 하던 고양이가 생각나 그냥 받아 온 것이었는데, 생각지 못한 고양이가 마음에 들어한 모양이었다.
"아, 그만 웃으세요!"
물론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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