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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15. 00:12 | Posted by 이기님


00.


  소파에 누워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빈말로나마 푹신하다고 할 수 없는 소파는 사이토가 아폴론미디어의 지원 하에 구색삼아 가져다 놓은 것으로, 기계의 정밀함에는 예민하나 인테리어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사이토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는 물건이었다. 사이토의 연구실을 자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소파 대신 안쪽에 있는 사무실용 의자를 가져다 앉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딱히 있을 곳이 없어 마지못해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기계가 많은 곳이다 보니 온도가 제법 낮다. 약 30분간 같은 장소에서 아이를 관찰한 결과 아이가 점점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바지에 몸의 라인이 드러나지 않는 도톰한 패딩조끼를 입은 아이는 골격으로 보나, 예쁘장한 생김으로 보나 소녀가 확실하다. 그러나 이렇게 작은 사람은 사이토를 제외하고 처음 본다.


"안 돼, HTBF_01."


이름을 불린 그것은 소녀를 향해 뻗어지던 손을 멈추었다. HTBF_01은 눈꺼풀을 감았다 다시 떴다. 가까이에 있는 것을 응시하던 렌즈가 초점을 맞추어 사이토의 연구실 안쪽으로 이어지는 문에서 나오는 코테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나온 문 쪽엔 버나비가 입구에 몸을 기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테츠는 HTBF_01의 등을 두어번 툭툭 두드리고 지나가 쇼파 위의 웅크린 소녀를 품에 안아들었다. ‘여자아이가 조심성이 없다니까.’ 라고 중얼거리는 것과는 달리 코테츠의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타의로 움직여지는 몸에 잠투정을 하는 소녀의 등을 살며시 도닥이며 어르는 코테츠의 표정은 HTBF_01가 처음 보는 표정이기도 했다. HTBF_01가 코테츠의 처음 보는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사이 품 안에서 다시 편한 자세를 찾은 듯 소녀의 잠투정이 멈추고 다시 고른 숨을 내쉬고 잠들었다. 코테츠는 익숙하게 품에 소녀를 품은 채 HTBF_01를 향해 개구지게 웃어보였다.


"우리랑 달리 작고 섬세한 몸이니까, 아직 만지면 안 돼."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단호하다. HTBF_01는 사람의 말에 순종하도록 정해져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느새 코테츠의 곁에 다가온 버나비가 손을 뻗어 천천히 손가락 등으로 소녀의 볼을 쓰다듬는 것을 얌전히 바라보았다.


“응접실이 조금 추웠는지도 모르겠네요. 코테츠씨가 억지를 부리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늦게 나오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카에데양의 잘못이라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아니, 뭐 딱히 잘못했다고 하는 말은 아니잖아.”


티격대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소녀를 의식한지 평소보다 작았다. 두 사람은 소녀를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소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볼로 기분 좋은 듯 코테츠의 목에 얼굴을 부비며 고른 숨을 내쉬었다. 소녀의 볼을 쓰다듬던 버나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곤 HTBF_01에게 말했다. 들어가 보세요, 사이토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버나비가 턱짓으로 가리킨 문으로 향하며 HTBF_01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펼쳐진 손은 소녀의 얼굴만 했다. 아니, 소녀의 얼굴이 고작 손바닥만 했다. 사이토는 키가 작기는 했지만 얼굴이 그렇게 작진 않다. 불량품인가. 코테츠는 그 소녀가 작고 섬세하기 때문에 만져선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언제가 되면 그 작은 것을 만져도 될까. 오늘의 점검이 끝나고, 더 이상 알류미늄 캔을 우그러트리지 않게되면.. 잠시 수치를 가늠하는 사이 사이토가 매우 작은 진동으로 HTBF_01에게 인사를 건냈다. HTBF_01는 코테츠를 흉내내어 인사했다.


“안녕, 닥터 사이토.”





  점검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목표를 설정해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다른 기계들과 달리 HTBF_01은 인간과 가장 흡사한 행동거지를 흉내 내도록 설정되어있기 때문에 의미 없는 움직임에 동력을 소모하는 것 까지도 '할 일'로 들어간다. 물론 프로그램을 잠시 오프로 돌려놓으면 그런 의무감도 조금 사그라들기 때문에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어야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프로그램을 잠시 오프로 돌려놓아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동력소모를 유지하는 버그가 생겼다. 사이토가 점검을 진행하는 사이 HTBF_01는 자체적으로 메모리 정리에 동력을 소모하기 시작했다.


연산회로를 스치고 중앙메모리에 차곡차곡 순서대로 정리된다. 영상데이터로 저장 된 그것들은 시각센서를 사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색'을 투영했다. 처음 눈을 떠 보게 된 것은 버나비 브룩스 주니어였다. 그는 유전의 색소열성인자로 인한 금색의 체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녹색 눈동자, 시력의 퇴화로 촛점을 잡도록 도와주는 렌즈를 코에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시각센서를 가동한 HTBF_01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이거 진짜 움직이는겁니까? 진동이 잠시 HTBF_01의 회로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로는 빨랐다.


사이토의 얼굴이 보였다가 외형의 모델이 된 카부라기 코테츠의 당황하는 얼굴이 나타났다. 만나 본 사람이라곤 이 셋이 전부다. 근력과 동력의 소모를 테스트하고, 부품을 갈고, 카부라기 코테츠와 흡사한 음성출력을 내기 위해 조율하는 일들이 시간의 흐름 기준으로 차곡이 쌓이다 마지막 조각 데이터가 조각 모음 된 블럭의 가장 위에 살풋 얹어졌다. 쇼파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던 소녀가 있었다. 상기 된 볼을 한 작고 섬세한 것. 연약한 것. 그리고... 


순간 데이터 폴더가 강제 종료되고 있음을 인식한다. 사이토가 HTBF_01의 동력을 멈춘 것 같았다. 신체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늘 해오던 일이었기 때문에 HTBF_01는 정리 된 데이터가 손상되지 않음을 확인하곤 연산을 멈췄다. 그리고 끊어지는 동력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스스로에게 작게 속삭였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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